디커의 게임/IT/리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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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팩션이란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합성한 말로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만든 새로운 가상 스토리를 일컫는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의 선풍적인 인기를 계기로 촉발된 소설·영화·드라마의 팩션 열풍은 21세기 문화예술 장르의 가장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팩션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올 가을은 유난히 굵직굵직한 작품들이 줄을 잇고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은 9월 4일 개봉 예정인 영화 '신기전'이다. 신기전은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세계 최초 다연발 로켓화포를 가리킨다. 물시계인 자격루와 측우기 정도는 알아도 조선 초에 로켓화포가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신기전'은 조선시대 예절서인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기록된 설계도로 시작해 대부분의 내용을 허구로 채운다. 조선을 압박하고 신무기 개발을 저지하려는 명나라를 신기전으로 혼내준다는 것이 허구의 골자다. 김유진 감독은 로켓화포와 극중 명나라 사신의 칙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허구라고 설명했다.

올 가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수놓을 또 하나의 팩션 아이템은 그림 '미인도'로 유명한 조선 후기 3대 풍속화가 중 한 명인 혜원 신윤복이다. 영화 '미인도'와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9월 24일 첫 방영)은 공교롭게도 신윤복이 남장여자라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하지만 허구의 방향성은 아주 다르다. 이정명 작가의 동명 팩션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스승 김홍도와 신윤복의 경쟁구도 속에서 왕실과 조정 내의 음모를 좇아가는 미스터리 형식을 띠고 있는 반면 영화는 도발적인 티저포스터가 암시하듯 남장여자 신윤복과 김홍도의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미인도'는 '색, 계' 못지않은 파격적이면서도 세련된 정사 신으로 관객들을 유혹할 예정이다.

'바람의 화원'과 혼동을 일으키는 제목의 KBS2 '바람의 나라'(10월 15일 첫 방영)는 김진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만화가 원작이다. 뮤지컬과 게임으로도 제작됐을 만큼 큰 인기를 누린 원작만화의 명성을 어떻게 이어나갈지가 관건인 작품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이야기를 다룬 원작만화는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판타지적인 요소를 갖춰 수많은 열혈 독자들을 양산해낸 바 있으며 드라마 '태왕사신기'가 이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아 다시 한번 관심을 끌기도 했다.

팩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소설들은 독서의 계절을 맞아 일찌감치 서점 입성을 마쳤다. 국내 소설로는 신라시대 학자 김가기의 이야기를 다룬 '풍류왕 김가기',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그린 '일본정벌군', 백제 무왕의 성장기를 그린 '연서' 등이 눈에 띄고 해외 소설로는 셰익스피어와 관련한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퍼스트 폴리오', 오스카 와일드와 코난 도일을 등장시킨 팩션 추리소설 '오스카 와일드 살인사건' 등이 독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팩션 장르가 지속적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건 무엇보다 허구를 다루는 문화예술 장르의 소재가 고갈됐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허구를 다룬 작품들은 유사한 소재의 반복으로 인해 신선도가 날로 떨어지고 있으며 대중들의 관심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 실화를 다룬 작품들도 점점 허구적인 부분을 늘려가고 있는 추세다.

한 영화관계자는 팩션영화 제작이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팩션영화는 친숙함과 호기심, 낯설음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면 자세한 설명 없이도 익숙함을 활용해 더욱 많은 관심을 끌 수 있고 허구적 상상력으로 오락적 특성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팩션영화의 상업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팩션 장르의 인기를 역사에 대한 욕망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역사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과 이를 채우려는 욕망 또는 역사를 바꾸고 싶은 욕망 등이 부딪히면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다. 일례로 존 F. 케네디나 다이애나 비의 죽음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가 숨어 있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음모론이 제기된다는 것 자체가 팩션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방증하는 것이다.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팩션은 매력적인 장르다. '황산벌' '왕의 남자'로 팩션영화의 가능성을 실험한 이준익 감독은 "역사책은 보물창고"라며 "역사책을 읽고 있다 보면 영화로 만들고 싶은 아이템이 수없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팩션 장르의 인기는 계속될 것이란 의미다. 올 가을 불어닥칠 팩션 열풍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자못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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